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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부터 건강하기

85번째 촛불, 엄마의 숨결

by 방통e 202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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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우리 가족은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바로 어머님의 85번째 생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치매라는 병이 어머니의 기억을 조금씩 흐릿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중심이자 따뜻한 품이 되어 주십니다.
이날만큼은 모두가 마음을 모아, 어머니를 위한 하루를 준비했습니다. 무겁지도, 과하지도 않게. 단지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만한 음식과 분위기, 그리고 사랑이 담긴 시간들로 말이죠.
 
우리는 근처에서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뷔페 레스토랑을 예약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습니다. 언니네 가족, 조카들, 우리 부부까지. 각자의 삶으로 분주하게 흩어져 있다가도 어머니의 생신에는 하나처럼 모이는 우리 가족. 어머니는 뷔페 입구에서부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검은색에 알록달록한 블라우스를 입고 계셨는데, 환한 미소와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을 만큼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뷔페 테이블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들이 풍성하게 놓였습니다. 갈비찜, 생선 전, 과일, 부드러운 죽, 알록달록한 디저트들까지. 조카는 할머니 옆에 꼭 붙어서 음식을 골라다 드리고, 작은 포크로 케이크를 떠먹여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이게 뭐야? 예쁘다~~.맛있네~” 하시며 매 순간을 즐기셨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어머니는 몇 번인가 우리 이름을 헷갈리셨지만, 눈빛은 변함없었습니다.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어머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매 가족, 치매 가족 생신 파티

 
 
 
식사 후에는 어머니 댁으로 모였습니다. 진짜 생일 파티는 이제부터였죠.
조카가 정성껏 케이크 명장 가게에서 사온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부드러운 생크림 위에 딸기가 잔뜩, 명장 이름표가 새겨진 초콜릿, 주변에 둘러진 딸기 초콜릿이 너무 맛있다며 평소엔 케이크에 올려지거나 둘러진 초콜릿은 안 먹는데 다 먹었네요, 케이크를 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짝였습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의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거실 불을 끄고, 촛불을 하나하나 켜자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어머니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큰 숨을 들이쉬어 촛불을 ‘후우—’ 하고 불었습니다. 놀랍게도 85살의 촛불을 한 번에 꺼버리셨습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죠.
“어머, 엄마 아직 기운이 대단하시네요!” “이 정도면 90세까지도 거뜬하시겠어요!”
 
어머니는 웃으시며 “오늘이 내 생일이냐~?” 하셨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모두 웃으면서도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습니다. 치매가 어머니의 기억을 흐리게 해도, 그분의 삶의 의지와 우리를 향한 사랑만큼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 말 한마디가 증명해 줬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조용한 어머니의 거실에서 조카들과 함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 속 사진들을 넘기면서, 어머니의 환한 웃음, 모두가 함께한 테이블, 촛불 앞에서의 그 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어머니의 잃어가는 기억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잊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가족이란, 그렇게 서로의 기억을 나눠 가지는 존재 아닐까요?
 
85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전쟁도 있었고, 가난도 있었고, 아이들 키우느라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던 시절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지금은 치매라는 또 다른 싸움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엄마’입니다.
 
그날의 생신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숨결, 촛불의 흔들림, 모두가 함께한 노랫소리. 그리고 ‘후우—’ 하고 촛불을 끄던 그 순간의 강한 생명력과 따뜻함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매년 이 날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마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어머니와 함께 또 다른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고, 생일을 축하하겠지요.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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